조선시대 살아보기
서민들의 실질적인 일상을 똑 소리 나게 들려주는
한국사 고수 반주원의 진짜 조선시대 ‘역사 읽기’
그동안의 역사서는 궁중의 정치적 사건, 왕들의 행적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왕조 중심의 거대 담론이 아닌 미시사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별 구성이 아닌 주제별 구성으로 정치적 견해나 교과서적 정의에서 벗어나 서민들의 실질적인 풍경을 다루고자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궁중 난투극 대신 조선시대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주 사소한 일상사에 초점을 맞춘다. 실질적으로 생활의 영역에서 현재 우리의 삶과 비교하여 선조들은 어떻게 씻고, 어떻게 먹고, 어떻게 놀며 살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실질적으로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특징인 유교사상의 엄격함과는 또 다른 색다른 측면이 있었음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역사 하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고리타분한 왕조와 세력, 정치적 사항을 가급적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문화적 차원으로 접근하여 실생활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윽하고 친근해서 그리운 이의
살 냄새 같은 삶의 자취, 조선 생활 실록
할급휴서와 이혼의 기록, 화려한 사라능단과 관자와 풍잠, 태생이 다른 마을 이태원, 한류의 주역 김명국과 조선통신사, 낯선 이방인 하멜과 다블뤼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진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대중의 것인지 특별한 지배층의 것인지, 그 뜨거운 논쟁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쉼 없이 이루어졌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업적도 다수의 대중이 생활 속에 정착시켜 함께 할 때만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삶의 자취를 자연스럽게 기록하는 생활사라는 부분은 특별하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도 마치 숨 쉬는 공기처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보를 담뿍 담고 있다. 진한 향수의 인위적인 향내는 아니어도 그윽하고 친근해서 그리운 이의 살 냄새 같은 분야가 생활사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가깝고도 먼 시대로 생각했던 그 시대, 남존여비사상에 묶인 고리타분한 성리학 국가라는 선입견으로 바라보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리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이혼과
결국은 성리학의 규범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던 열녀문
건국 당시만 해도 조선은 여자의 경우에도 이혼과 재혼을 금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민이 이혼을 원할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쓰곤 했는데 ‘사정파의’와 ‘할급휴서’가 그것이다. ‘사정파의’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고 생각되면 두 부부가 마주 앉아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쿨하기 그지없다. ‘할급휴서’는 칼로 저고리 앞섶을 베어서 그 조각을 상대에게 이혼의 표시로 주고 상대방이 그것을 받으면 이혼을 수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할급휴서’의 경우 잘라낸 옷자락이 날개를 편 나비 모양과 같다고 하여 “나비를 주고받았다”라는 말로 이혼에 동의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혼에 동의하는 표식이라면 이것 또한 일종의 이혼합의서와 같은 것인데 하늘하늘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떠올리는 조상들의 운치 있는 행동과 정서는 삶의 아픈 순간에도 멋들어지게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것이다. 일반민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혼을 선택한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집을 나누어 거주지를 분리하지 못하고 같은 집, 심지어 같은 방에서 구역을 정해 동거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조선이 점차 성리학의 도를 국가 차원의 정치 규범으로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여자라면 누구나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고 나면 자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던 여성에 대한 삼종지도가 강조되었다.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점차 생활 전반의 규율로 확대해 나가던 조선이라는 국가 입장에서는 여성이 한번 혼인을 했다면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다시 시집가지 않고 수절을 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절을 지키는 바른 아내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성리학의 대표적 규범과 도리가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시각화하여 입증하는 훌륭한 사례였다. 결국 생계로서의 재혼에서 보다 자유로운 양반 사회를 시작으로 여성이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와 장치가 만들어지며 강조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일반 양인 여인에 이르기까지 관습적으로 칭송받을 만한 일로 정착되어 갔다.
조선은 건국 이후 차츰 남녀의 재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분화되면서 여자의 재혼이나 삼혼을 공식적으로 막아줄 방법이 명확하게 없던 시절에 이를 부정하고 음탕한 행동으로 몰고 자식의 생업과 출세와 연루시켜 불이익을 주는 방법을 통해 우회적이지만 치명적인 제재를 가한 셈이다. 초기의 조선은 직접적으로 개가를 금지하기보다는 개가한 여인의 자녀에게 사회적 제약과 불이익을 준다는 족쇄를 채워 여인 스스로 재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인데, 이러한 제재는 아들이 관직에 등용되고 벼슬길에 들어서는 것이 최고의 영예이자 돈을 버는 경제활동의 전부였던 양반가에 국한되어 실효성이 발휘될 수밖에 없는 한정적인 제재였다.
조선은 여자의 개가를 직접적으로 금지하기보다 사회적 제약과 불이익을 준다는 족쇄를 채워 여자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여자에게 ‘재가는 악행이고, 수절은 선행’이라는 논리가 제도적 장치와 어우러져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기록에 의하면 건국 이후 명종 때까지 국가가 공인한 열녀의 수가 272명인데 반해 선조 이후에 접어들면 845명으로 그 수가 매우 빠르게 늘었고 급기야는 남편의 병 수발을 위해 제 살을 잘라내어 먹이거나 남편이 죽자 슬픔과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는 식의 스토리가 가미되며 열녀를 추종하는 분위기는 날로 심화된다.
밤낮으로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던 조선시대 한류 바람과
이방인의 눈으로 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조선
‘한류’라는 낯선 말이 여기저기에서 폭죽 터지듯이 들려오기 시작하던 무렵,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과 일본 내에서 우리 드라마와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한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취재한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류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던 것일까?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조선의 역사 속에도 우리의 문화에 열광했던 주변 국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세기 중반, 인조와 효종 시절을 거치며 조선 중기를 풍미한 이름난 도화서 화원 김명국은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을 오가며 특색 있는 그림을 그려서 큰 인기를 누렸던 인물로 유명하다.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과의 교류가 재개된 이후 총 12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왔지만 같은 화원이 두 번이나 통신사와 함께 한 경우는 김명국이 유일할 뿐만 아니라 이중 두 번째 일본 방문은 일본으로부터 김명국 같은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는 특별한 요청이 있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일본의 특별한 요청은 김명국의 인기가 당시 일본에서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통신사에 김명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일본의 귀족과 관리들이 김명국의 그림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곤 했다. 통신사가 직접 적은 기행문인 《해사록》의 한 부분에는 1636년 김명국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김명국의 그림을 청하는 일본인들이 밤낮으로 구름 떼처럼 모여드는 바람에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던 김명국이 지친 나머지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한 외국인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하멜과 《하멜 표류기》를 떠올릴 것이다. 하멜뿐만 아니라 다블뤼, 쥐베르 등 그들에게는 낯선 나라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들 이 있었다. “갑곶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의 풍경은 특히 아름다웠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곧게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이면 아름다운 논과 밀밭, 옥수수밭, 무밭,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숲과 촌락들이 서서히 어둠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삐뚤빼뚤 이어가며 경계를 짓고 있는 논밭의 모습은 마치 아이들이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놓은 퍼즐처럼 보여서 우리네 평야가 보여주는 직선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 그리고 더 멀리 겹겹이 포개진 산들의 명암과 안개 자욱한 그 사이의 계곡들은 따뜻하고 행복한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조선)에서 우리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감탄하며 볼 수밖에 없는 사실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해도 어디든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앙리 쥐베르의 글에 드러난 조선의 모습은 우아하고 학구적이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독일의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여행기도 한국의 아름다움을 진솔하게 담아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뀐 후의 기록이긴 하지만 이 땅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1911년 2월 17일부터 6월 24일까지 129일간 직접 여행한 기록을 담아 1915년 펴낸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사람과 우리나라 자연을 가장 깊이 있게 파악한 외국인의 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한국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연을 꿈꾸듯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 산마루에 진달래꽃 불타는 봄이면,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진달래꽃을 응시할 줄 안다. 잘 자란 어린모가, 연둣빛 고운 비단 천을 펼친 듯 물 위로 고개를 살랑인다. 색이 나날이 짙어졌다. 한국인은 먼 산 엷은 푸른빛에 눈길을 멈추고 차마 딴 데로 돌리지 못한다. 그들이 길가에 핀 꽃을 주시하면 꽃과 하나가 된다. 한국인은 이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할 뿐이다. 그들은 꽃을 꺾지 않는다. 차라리 내일 다시 자연에 들어 그 모든 것을 보고 또 볼지언정, 나뭇가지 꺾어 어두운 방 안에 꽂아두는 법이 없다. 그들이 마음 깊이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자연에서 추상해낸 순수하고 청명한 색깔이다. 그들은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색상을 그대로 활용한다. 무늬를 그려 넣지 않고, 자연의 색감을 그대로 살린 옷을 아이들에게 입힌다. 따라서 이 소박한 색조의 민무늬 옷들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원숙하고 예술적이다.”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 글을 쓴 독일인 신부의 시선이 얼마나 따뜻하고 우호적인 것인지 가슴이 바닥부터 훈훈해지는 느낌이 절로 든다.
‘들돌들기’, ‘손더듬’ 등 조선시대의 성인식과
그 시대에도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매달이 청춘남녀들의‘데이’로 가득 차 바쁘게 돌아간다. 2월의 밸런타인데이와 3월의 화이트데이는 이젠 고전적인 기념일로 젊은이들에겐 전통의 명절 수준이고 이름도 다양한 기념일들이 자본주의 상술로 중무장한 채,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중에서도 5월 셋째 주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라 하여 본래는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주고, 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해 지정된 날이지만 실제로는 꽃다발, 향수, 키스라는 낭만적인 조합으로 포장되어 본연의 의미가 가려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발렌타인데이와 같이 사랑의 징표를 나누는 날과 성년의 날과 같은 기능을 하는 기념일이 있었을까? 오늘날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대부분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단지 모양과 형식과 사용하는 도구에서 차이가 날 뿐이었다.
조선시대 성년의 날에는 ‘관례’라는 이름의 성인식이 치러졌다. 사실 관례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에도 성인식이 치러졌음을 알려주는 구절이 보이고 《고려사》기록 속에도 고려 광종이 아들을 위해 관례를 치르고 연회를 베푼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의 뿌리가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관례는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정신과 육체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15~20세 전후에 행해지는데, 왕실과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혼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혼하지 않은 자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 대우를 해주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화려한 의식을 치르고 연회를 베풀지는 못했지만 일반민들은 ‘들돌들기’라는 의식으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음을 주변에 알리곤 했다. ‘들돌들기’는 마을 어귀 성황당 나무 아래에 크고 둥근 바위를 두고 그 돌을 들면 어른, 들지 못하면 아이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농업이 국가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조선에서 제대로 된 성인 남자 한 명의 노동력으로 인정받느냐 아니냐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가정을 꾸려 가장의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의 여부와 직결되는 것이어서 육체적인 힘을 인정받는 것이 곧 성인으로서의 인정을 받는 일이었다. 실제로‘들돌들기’를 해낸 자와 아닌 자는 품삯을 지급할 때에도 차등을 두었다.
일반민 여자의 경우는 ‘손더듬’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15세 전후의 딸을 동네 여인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길쌈 두레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날을 잡아 음식을 준비해서 동네 어른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아직 어려서 손으로 하는 섬세한 길쌈에 서툰 딸이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 여자처럼 일을 할 테니 잘 가르치고 이끌어 달라는 의미를 담은 행사였다. 남자의 ‘들돌들기’처럼 여자도 ‘손더듬’을 하고 나면 성인 여성 노동력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성인식인 관례를 치르고 본격적으로 몸도 마음도 한층 성숙해질 즈음의 젊은이들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사랑에 눈을 뜨기 마련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봄을 알리는 개구리의 몸짓이 선명한 ‘경칩’(양력 3월 5일경)은 조선시대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역할을 하며 연심을 품은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특별한 날로 애용되곤 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씁쓸한 맛이 나는 은행열매가 땅에 떨어져 싹을 제대로 틔우기만 하면 천 년을 가는 은행나무로 성장하는 것처럼 헤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서로에게 은행을 선물한 것이다. 은행의 한자 표기는 ‘銀杏’로 은빛 살구라는 뜻이다. 작고 소중한 ‘은빛 살구’는 사랑의 징표로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몸에 문신으로 새기듯이 조선시대에도 문신으로 사랑을 증명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새기는 문신을 ‘연비’라고 불렀다. 《성종실록》을 보면 양반가의 유부녀임에도 여러 남자와 정을 통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어우동(어을우동)을 잡아들였는데 팔뚝에 정을 통한 사내들의 이름이 가득하게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이름이 넘쳐나서 등에도 문신이 있어서 그들을 잡아들이고 어우동은 교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듯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연비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조선시대에 문신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간통을 조사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