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혼과 즐거움이 자라는
헤르만 헤세의 정원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작가로 노벨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 하지만 그는 조국인 독일이 일으킨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반대하여 출판을 금지당하고 배신자, 매국노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불행까지 겹치며 정신치료를 받았다. 그는 정신치료를 받으며 꽃과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자기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에도 열중했다. 헤르만 헤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찾는 작가였지만, 정원을 가꿀 때에는 자신을 잊은 채 새벽부터 잡초를 뽑고 토마토와 꽃을 돌보고 낙엽을 태웠다.
그는 한때 포도 농사로 생계를 해결할 만큼 정원을 가꾸는 솜씨가 좋았다.
헤르만 헤세는 집을 옮길 때마다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은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라고 헤세는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정원에서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가꿔 나갔다.
저자소개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는 신교(新敎)의 목사이고, 어머니 마리는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하였으나, 그와 사별한 후 요하네스와 재혼하여 그를 낳았다. 헤세는 4세부터 9세까지, 한때 스위스의 바젤에서 지낸 것 외에는 대부분 칼프에서 지냈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를 입학했으나 천성적인 자연아로서, 개성에 눈뜨면서 미래의 시인을 꿈꾼 헤세는, 신학교의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주, 한때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이때의 경험은 지나치게 근면한 학생이 자기 파멸에 이르는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1906)에 잘 나타나 있다. 노이로제가 회복된 후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못 되어 퇴학하고, 서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 후 한동안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병든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칼프의 시계공장에서 3년간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한 헤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간됐다. 특히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으며,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904년 첫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문학적 지위가 확고해졌다.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고, 스위스의 보덴 호반의 마을 가이엔호펜으로 이주한 후 글쓰기에 전념하였으며, 1923년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1906년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한 후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군 입대를 지원하나 부적격 판정을 받고 독일 포로 구호 기구에서 일하며 전쟁 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한다. 그는 융의 제자인 랑 박사와 함께 정신 분석을 연구하며 융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 영향이 『데미안』(1919)에 나타난다. 이 작품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으로 독일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서른세 살이 되는 해 인도 여행을 감행하고 이 경험은 1922년 출간된 『싯다르타』에 투영되었다.
나치의 광기가 극에 달한 시기에 쓴 마지막 소설 『유리알 유희』(1943)는 931년에 쓰기 시작해서 1943년에 최종적으로 완성 하였다. 정신적인 봉사와 문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유리알 유희』 속에 세웠다.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동서양의 철학, 문학, 음악 등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녹여내 유럽 지식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두 개의 동화가 있는 크리스마스」는 1951년 발표된 에세이로, 헤세 동화집 『두 형제』에 담겨 있다. 1955년에는 독일출판협회의 평화상을 받았다.
이후 정치적 논문, 경고문, 호소문 등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글들을 발표하는 한편, 이상 사회의 실현을 꿈꾸며 다양한 소재의 동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동방순례』 등 세계 독자들을 매료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타고난 평화주의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을 비판하여 나치 정권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보내며 수채화를 즐겨 그리고 정원 일을 매우 좋아했다. 헤세는 화가로도 성공을 했으며, 3,000점 이상의 수채화를 남겼다.그가 걸어온 긴 생애에는,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일, 제1차 세계대전과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그 자신의 신병 등 가정적 위기를 당하자 정신분석 연구로 이 위기를 타개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한 나치스의 광신적인 폭정에 저항한 일 등 많은 파란을 겪었지만,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오로지 자기실현의 길만을 걸었다. 뇌출혈로 사망한 후 아본디오 묘지에 안치되었다.
소설 『데미안』은 1919년 헤르만 헤세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창작에 임했으며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이다. 이후 평론가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분석을 통해 원작자가 헤르만 헤세인 것으로 밝혀졌다. 소설 『데미안』은 당시 사회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으며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 내면의 혼란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작 소설로 손꼽힌다.
주요작품으로 제2의 장편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로스할데』, 『크눌프』, 정신분석 연구로 자기탐구의 길을 개척한 대표작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황야의 이리』, 『지와 사랑』, 『동방여행』,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유리알유희』, 『헤세와 로맹 롤랑의 왕복서한』 등이 있다. 또 이 밖에 단편집, 시집, 우화집, 여행기, 평론, 수상, 서한집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