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 나비가 되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던 사람 이야기
신비한 영적 체험이나, 깊은 묵상 속에서 꿈꾸듯 만나는 형상이 아닌, 하느님 실체를 이 세상에서 직접 대면하는 일은 가능할까?
김 씨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가르침을 믿고 온전하게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춘자를 만났다.
춘자는 가난하고, 배움도 짧고, 볼품없는 과부지만 나누고, 베풀고, 보듬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김 씨는 가혹하다. 김 씨는 온전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
김 씨는 왜 하느님을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김 씨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면 그저 눈물을 흘리며 욥기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리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가슴에 찍힌 화인火印이 지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기 42, 6)
이 소설은 이 씨가 썼다. 우리글 띄어쓰기는 꽤 까다롭다. 한 예로 ‘이씨’와 ‘이 씨’는 의미가 다르다. 그 차이를 단순하게 정의하면 전자는 무리, 후자는 개체다. 이씨 속에서 이 씨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쉽고 편안함이 추구하는 삶의 전부가 아닐뿐더러, 무리에 매몰되면 개체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조화를 이루는 일은 주체가 무엇이든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씨는 문예지를 통해 필명을 얻은 적이 있지만 글솜씨도, 치열함도 적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은커녕 그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이어 가는 것은 그게 이 씨로 사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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