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上)
도다 조세이(戶田城聖)의 뒤를 이어 창가학회 제3대 회장이 된 야마모토 신이치(山本伸一)가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佛法)의 인간주의의 빛을 세계로 넓혀 민중개가를 이루는 준엄한 ‘사제(師弟)의 길’을 그린 대하소설이다.
[각장의 개요]
【대산】
1979년 2월 16일, 인도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신이치는 홍콩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신이치는 홍콩중문대학교 마린 부총장과 대화하고, ‘동남아시아 대표자 간담회’에도 참석하는 한편 홍콩총독을 예방(禮訪)한다. 그리고 ‘79홍콩문화제’에 참석한다. 1961년에 지구를 결성한지 불과 18년만에 성대한 문화제를 개최할 정도로 발전한 홍콩의 모습에 신이치는 ‘홍콩에 21세기를 비추는 평화의 등대를 만들었다.’고 실감하며 20일 귀국한다.
일본에서는 젊은 승려들이 학회에 대한 비난중상을 거듭하는 속에, 3월 중순에는 한 부회장이 종문에 대해 경솔한 발언을 한다. 이는 공격의 빌미가 되어, 책임을 추궁하는 화살은 신이치에게 향한다.
종문에서는 신이치가 법화강 총강두에서 사임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단도가 된 탈회자들은 회장직을 사임하라고 요란하게 떠들어 댄다. 신이치는 후계의 흐름을 만들고, 세계 지도자와 대화하는 등 문화 · 교육의 추진에 힘을 쏟기 위해 회장 교체를 이전부터 생각해왔었다.
그는 학회수뇌회의에서 종문 승려의 불합리한 공격에 마침표를 찍고, 학회원들을 지키기 위해 일체의 책임을 지고 총강두에서 사임하며, 또한 세계광포 신시대의 흐름을 열기 위해 회장에서 사임하기로 결단한다.
4월 24일 현장회(縣長會)에서 회장사임이 발표되며, 연달아 실시된 총무회(總務會)에서 신이치는 명예회장이 되고, 주조 기요시가 제4대 회장에 취임한다. 이 뉴스를 전해들은 학회원들은 크게 놀란다. 신이치는 그날 저녁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다음날 본부간부회에서 참석자 모두를 격려한다,
그러나 이후 그는 자유롭게 회합에 참석해 지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는 학회를 지배하려고 획책하는 변호사와 종문 승려들의 음모였다.
5월 3일 ‘일곱개의 종’ 총마무리를 기념하는 본부총회에는 다수의 종문 승려가 참석해,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회합이 진행된다.
종료 후 신이치는 자신의 맹세와 제자들을 향한 심정을 ‘대산(大山)’ ‘대앵(大櫻)’ 이라고 휘호한다. 5월 5일에도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정의(正義)’ ― 그 오른쪽 아래에는 ‘나 홀로 정의의 깃발 드노라’라고 쓰며 광선유포의 대도를 끝까지 나아가리라 서원한다.
【자복】
제3대 회장을 사임한 신이치는 철저히 동지를 격려하는 대화를 한다. 그리고 세계평화를 향한 흐름을 열기 위해 각국의 대사나 식자들과의 대화에 힘쓴다.
이해 여름 세계 41개 나라 3개 지역의 SGI 맴버 1300명이 일본을 방문한다. 신이치는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개최한 국제친선우호 모임과 도쿄도다기념강당에서 개최한 세계평화기원근행회에 SGI회장으로서 참석해 맴버들을 격려한다. 또 나가노현 가루이자와마치에 있는 나가노연수도량을 첫 방문한다.
종문의 압력이 가해지는 속에도, 광선유포의 투쟁은 멈출 수 없었기에, 은사 도다 조세이와 마지막 여름을 보낸, 녹음(綠陰)이 우거진 땅에서 행동을 개시한다. 가정방문 · 개인지도의 흐름을 일으켜 사쿠시(佐久市), 고모로까지 멀리 발을 뻗친다.
또 기념촬영을 실시하는 등 지혜를 쥐어짜내 전혼을 기울여 불자(佛子)인 동지를 향한 격려를 거듭한다.
80년 1월 시코쿠의 동지 약 800명이 대형 여객선 ‘썬플라워 7호’를 빌려 신이치가 기다리고 있는 가나가와문화회관으로 온다. ‘스승이 행동에 제한을 받으신다면, 제자가 뵈러 가겠다.’라며, 구도의 불꽃을 불태우며 모인 것이다.
2월에는 가고시마현 아마미오섬 지역본부의 여자부 86명이 도쿄 다치카와문화회관에 있던 신이치의 슬하로 모인다. 종문 승려들은 광선유포에 살아가는 창가 사제를 이간질하려고 했지만, 사제 혼의 유대는 어떠한 시련의 열풍에도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신이치는 마(魔)의 암운을 단호히 물리치고 다시 한번 창가학회가 광선유포 사제의 길에 맥진할 수 있도록, 1년에 걸친 자복(雌伏)의 때를 보내고 마침내 반전공세를 향해 굳게 결의한다.
【웅비】
1980년 4월 21일 오후, 야마모토 신이치는 창가학회 제5차 중국방문단으로서 베이징에 도착해 덩잉차오(저우언라이 총리의 부인)의 자택인 ‘서화청(西花廳)’을 방문한다. 이후 베이징 대학교에서 강연하고, 화궈펑 주석(국무원 총리)과도 회견한다. 그리고 구이린시(桂林市)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작가 바진과 2차례 회담한다.
29일 귀국길에 오른 신이치는 그대로 규슈 나가사키로 향하여, 이곳에서 반전공세의 넓은 하늘로 웅비해간다. 나가사키와 후쿠오카의 모든 회합에 참석해 동지의 연대 속에 뛰어들고, 간사이에서 5월 3일을 맞이한다. 몇번이고 근행회를 개최하고, 주부(中部)에서도 분투를 거듭해 합계 15만명을 넘는 동지를 격려한다.
그리고 7월에는 ‘잊지 못할 존귀한 동지여’ 연재를 개시하고, 8월에는 중단되어 있던 소설 ‘인간혁명’의 연재를 세이쿄신문에 재개한다. 생명을 깎는 심정으로 쓴 원고는 모든 동지의 마음에 소생의 빛을 비춰간다.
9월 말, 신이치는 북미지도를 출발해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워싱턴DC, 시카고 등을 분주하게 다니며 격려한다. LA에서는 ‘제1회 SGI 총회’에 참석한다.
다음해 1981년 1월, 신이치는 북중미 지도에 나선다.
그런데 변호사 야마와키 도모마사가 학회에 대한 공갈 및 공갈미수 혐의로 체포된 일과 더불어 도쿄지검이 신이치에게 조사를 요청해 잠시 귀국한다. 2월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파나마, 멕시코 등을 방문한다. 신이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과 세계 동지들을 위한 격려행을 거듭해, 광선유포는 점차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5월에는 소련, 유럽, 북미 방문을 위한 여로에 오른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국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문화 교육을 전면에 내걸고 민중의 상호이해를 촉진하는 민간교류에 최대한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 신이치의 신념이었다.
티호노프 총리와의 회담을 비롯하여, 소련의 주요 인물, 문화인들과 대화를 거듭한 신이치는 8일간에 걸친 소련방문을 끝내고, 많은 동지가 기다리고 있는 유럽으로 향한다.
【효종】(전반)
소련을 출발한 신이치는 5월 16일, 서독에 도착한다. 여기서 독일 광포 20주년을 기념하는 교류회에 참석해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8개국에서 모인 800여명의 동지를 격려한다.
또한 불가리아를 처음 방문해, 국내 최고의 국립대학인 소피아대학교에서 명예교육학·사회학박사 학술칭호를 수여받고, 강연도 실시한다. 또 문화위원회 지프코바 의장, 국가원수 지프코프 국가평의회 의장을 예방하고, 어린이들의 모임 ‘평화의 깃발’에도 참석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방문한다. 20년전 당시에는 멤버가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지부가 탄생해 신심 간담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스트리아 본부를 결성. 다음날에는 본부장의 아파트를 방문해 일가족을 격려한다.
이어서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청년들의 환영을 받는다. 신이치는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창가학회의 눈부신 발전을 축복하면서, 그 사명을 짊어질 청년들과 간담을 거듭한다. 그리고 열차를 타고 밀라노로 이동해, 다음날 스칼라극장의 카를로 마리아 바디니 총재를 만난다.
이해 가을 민주음악협회(민음) 등의 초청으로 스칼라극장이 일본에서 공연하기로 것에 대해, 총재는 “이 공연은 야마모토 선생님의 힘이 없었다면 실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이치는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향한다. 트레에 있는 유럽연수도량에서는 18개국에서 500명의 맴버가 모여, 유럽 광포 20주년을 기념하는 하계연수 등을 개최한다.
격려의 무대는 꽃의 도시 파리로 옮겨졌다. 신이치는 21세기를 향한 대약진을 위해 신심의 기본과 창가학회의 정신을 전하고자, 순간순간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청년들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며 지하철 플랫폼과 자동차 안에서도 이야기를 거듭하며, 시를 선사하기도 한다.
6월 16일 오후, 신이치는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며 미국 뉴욕으로 향한다.